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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글나라편지쓰기대회 최우수상(일반부)
제 108호 소식지
윤희에게

  PX에서 후임이 스케치북에 그려준 벚꽃들을 보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났어. 너랑 자주 걸었던 김유신 장군묘 부근의 벚꽃들과 무척 닮았더라구. 깜짝 놀라서 한참을 들여다봤지. 나무뿌리가 옆에서 속삭일 것 같은 이 지하 훈련장에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들뜨더라. 아마 여기를 나갔을 때 너랑 같이 하게 될 일들이 기다려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엊그제 다빈이 발바닥에 압핀이 박혔다는 네 편지를 읽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아침이 되어서야 샛노란 얼굴로 공장에서 퇴근하는 네가 다빈이를 돌보는 건 누가 봐도 버거운 일이지. 백일 휴가를 나간 날 현관문 앞에서 봤던 퀭한 네 눈동자가 아직도 잊히지가 않네. 매제의 빈자리가 그때만큼 커 보인 적은 없었어.

  기저귀를 갈고, 젖병을 물리고,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나가는 것 등등 아기를 돌보는 일이 겉보기와는 많이 다르더라. 물 한 모금 마음놓고 마실 틈이 없었다고나할까? 근데 넌 이걸 매일 같이 한다니! 역시 엄마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 강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진짜! 나한테 다빈이를 맡기고 편하게 잠이 든 네 모습이 새삼 달리 보였어.

  저녁 때 집에 오신 아버지 품에 다빈이를 안겨 드렸더니, 갑자기 다빈이가 큰 소리로 울었어.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술이랑 담배냄새가 심하잖아. 사무실에서 퇴근하신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얼굴을 찡그린 것도 이 냄새 때문이었을 거야.

  너 기억나? 어릴 적 밤만 되면 작은 단칸방을 쩌렁쩌렁 울렸던 욕설과 울음소리. 술 취한 아버지의 손바닥이 어머니 얼굴을 거칠게 후려치던 소리랑 하염없이 흐르던 어머니의 눈물과 울음소리 말이야. 그날은 접시가 깨어져도, TV가 바닥을 뒹굴어도 우린 방 끝의 구석에서 얼굴까지 이불을 덮어쓴 채로 얌전히 잠이 들어야만 했었지.

  “나가! 이 썩을 년아! 할 짓이 따로 있지. 어디 딴 남자를…… 뭐, 일수? 돈놀이? 지랄을 해라! 미친 년! 나가! 나가 뒈져버려.”그 퀴퀴하고 매캐한 냄새들과 섞여서 들려오던 고함소리를 깜깜한 이불 속 두 쌍의 귀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을 거야.

  결국 사무실을 접고 다른 아저씨랑 먼 곳으로 떠나신 어머니가 우리들 어깨에 지고 간 빚더미와 살림의 짐들을 생각하면 미칠듯이 분노가 치솟았지만, 설거지를 하면서 자꾸만 어깨를 들썩이는 네 뒷모습을 보고서 난 마음을 고쳐먹었지. 그때부터였어. 이 못난 놈이 너 몰래 알바를 시작하고 집 안 청소와 빨래, 설거지로 부산을 떨었던 게. 돌이켜보니 이게 다 먼 옛 일처럼 까마득하네. 시간이 정말 빨리 가. 하긴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바로 공장에 취직해서 지금의 매제 손을 잡고 온 것도 눈깜빡할사이였으니까.

  그날 우리 집에 온 매제는 아무리 험한 일도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듬직해 보였어. 매제의 팔뚝에 불뚝 솟은 근육을 만져보면서 아버지도 흡족해하는 눈치셨고 말야.

  식이 끝나고 너희 부부가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불현듯 입영통지서가 내 앞으로 왔을 때에도 난 아무런 걱정 없이 입영열차에 몸을 실었지. 훈련소에 도착하자마자 개인정비하고 교육 받고 훈련을 하느라 워낙 정신이 없어서인지 한 달도 금방 가더라.

  자대 배치를 받은 첫 날 밤엔 내무반에서 자다가 꿈을 꿨어. 나 혼자 벚꽃이 활짝 핀 숲을 들어서다가 벌들이 꽃 속을 드나들면서 꽃가루를 전신에 묻힌 뒤, 벌집 안으로 잉잉대며 들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그게 너무 좋아 보이는 거야. 그 곳에는 여왕벌과 애벌레, 숫벌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알들도 있었어. 아, 나도 어서 저렇게 풍성한 가족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기상나팔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났지. 물론 그 뒤론 네 상상처럼 정신없는 훈련의 연속이었고……

  그런데 얼마 후 너한테서 온 편지는 내게 큰 충격이었어. 주말마다 매제가 너 몰래 아버지랑 같이 공사장에서 막일을 했었다는 것도, 공사 도중 고층에서 떨어졌단 것도 나는 그때 알았어. 특별휴가를 받아 집으로 한 걸음에 달려와보니, 집 안은 예상대로 난장판이더구나. 휠체어에 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매제와 소주병이 한 가득 쌓여 있는 침대 위에 누워 계신 아버지. 바닥에 지천으로 널브러진 쓰레기와 옷가지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더랬지. 복받치는 서러움을 눈물로 씻어내려는 것처럼 울고 또 울었지. 왼종일 하염없이……

  그런 와중에 다빈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줄은 우리 가족 중에 누구도 예상 못했었지. 그 똘망똘망한 눈동자랑 두툼한 입술은 너를 아주 빼다 박았었어. 웃을 때 지그시 양 볼에 패이는 보조개까지. 내 수화기를 건너오는 네 목소리가 밝아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을 거야. 벚꽃이 가지마다 줄줄줄 피어나듯이 이 웃음꽃들은 매제랑 아버지 얼굴에도 한 송이씩 피기 시작했던 것 같아. 요 작디 작은 것이 어쩜 그리 장하던지 원!

  어머니랑 엊그제 연락이 닿았다는 네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기뻤다. 황달기가 있으신 아버지의 입원 수속이랑 집안 일을 도와주기로 하셨다는 말에는 눈물이 앞을 가렸어.

  그래, 이제 힘든 날들은 다 지나간 걸 거야. 내 전역일도 사월 초순이니, 그날은 어느 때보다 화사한 봄을 몰고 너한테 갈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봄은 이미 네 뱃속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와서 우리 곁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는지도 몰라. 요즘 너랑 통화를 할 때면 꽃이 피는 것처럼 귓속이 환해져. 이 스케치북 속의 벚꽃들마저 금방 흐드러져 휘날릴 것만 같아.

  경주는 아직 가지마다 꽃봉오리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테니, 여기서부터 내가 분홍물결을 몰고 내려갈게. 매제의 휠체어를 내가 밀면서 너랑 아버지, 다빈이와 함께 김유신 장군묘 주위를 다시금 걷게 되는 그때쯤이면, 입술을 활짝 열어젖힌 꽃들이 누구보다 향기로운 얘기들로 우리들을 반겨줄 테니까. 그때까지 다빈이 잘 돌보면서 몸 건강히 있길 바래. 안녕!

지하훈련장에서
너의 오빠
병장 황재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