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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글나라 독서감상문대회 일반부 우수상_디아스포라의 눈
제 103호 소식지
얼마 전 도쿄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에서 한 차례 연기되는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올림픽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올림픽 기간 선수들이 보여준 열정은 전례가 없는 전염병의 유행 상황에 지쳐있던 국민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이전보다 성숙해진 국민은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냈다.

유도에서 값진 동메달을 딴 안창림 선수 역시 올림픽 기간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안창림 선수는 재일교포 3세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도에 입문하면서 일본으로의 귀화를 권유받았지만, 끝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귀화를 거부한 대가는 혹독했다. 일본 유도계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안창림 선수는 경기에 나설 때마다 
일본 선수로부터 견제를 받아야 했다. 올림픽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집중 견제 속에서도 투혼을 발휘한 그는 
마침내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에 동메달을 안겼다. 메달을 딴 직후 국내 취재진과 한 인터뷰에서 안창림 선수는 
“재일교포들은 일본에서는 한국인, 한국에서는 일본인 취급을 받는다.”라며 재일조선인들이 ‘경계인’으로 살며 느끼는 
애환을 이야기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 어디에도 온전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의 고통을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오롯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 없는 공감은 위선에 가깝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기에 조심스럽다. 완벽하게 공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재일조선인들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집어 든 책이 《디아스포라의 눈》이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본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며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하던 말이라고 한다. 후에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을 
일컫는 용어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디아스포라의 눈》의 저자인 서경식 교수는 재일조선인으로, 이 책을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과거 4년간 한국, 일본, 세계의 사상을 응시하며 쓴 글’이라고 소개했다. 주류인 국민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독자가 비주류인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사회, 정치적 이슈를 바라보고 생각했으면 하는 저자의 
마음이 잘 느껴졌다. 저자는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가 건전함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교토에서 태어난 서경식 교수는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71년, 한국에서 공부하던 두 형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일을 겪는다. 서 교수는 두 형의 석방을 촉구하는 구호 활동과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한 활동을 
하게 된다. 서 교수의 어머니는 결국 두 형이 석방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80년에 눈을 감는다. 서 교수는 이후 많은 
에세이를 집필하며 인권과 소수 민족을 주제로 한 강연 활동을 펼쳤다.

아픈 개인사를 지닌 탓일까? 서경식 교수는 이 책에서 누구보다 민감하게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포착해낸다. 
책을 읽다 보니 문득 《그건 혐오예요》라는 책에서 밑줄 그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차별에 가장 예민하고, 인권 감수성이 섬세한 사람들이 바로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들은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할 때도 사람들의 편견과 냉대 심지어 혐오와 적대적 시선과도 숱하게 맞닥뜨려야 한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사회적 모순과 차별 그리고 편견이 작동하는 방식을 민감하게 간파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시선과 통찰력을 갖추기까지 재일조선인으로 일본 사회에서 그가 감내해야 했던 
차별과 편견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는 <남의 일이 아닌 ‘묻지마 살인’>과 <생존 경쟁에 내몰린 젊은이들에게>였다. 
<남의 일이 아닌 ‘묻지마 살인’>에는 2008년 6월 8일 일본의 아키하바라에서 한 남성이 행인들을 트럭으로 친 뒤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등장한다. 경찰에 체포된 범인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아키하바라에 왔다. 세상이 싫어졌다. 
(죽인 상대는)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기 전 인터넷 사이트에 범행을 예고하는 글을
여러 차례 남겼는데, 저자는 범인이 쓴 글 중 “고교를 졸업한 뒤 8년간, 연전연패”라고 적은 글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고 
얘기한다. 서경식 교수는 생존 경쟁에서 이긴 사람을 ‘가치구미(승리조)’, 진 사람을 ‘마케구미(패배조)’로 지칭하고, 
‘마케구미’가 된 것은 본인의 책임이므로 동정하거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일본 사회를 비판했다. 
서 교수는 이 사건을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방향성 잃은 분노가 폭발한 참극이라고 정의했다.

이 챕터를 읽으며 마음이 참 복잡했다. 범인이 저지른 죄는 극악무도하고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지만,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일본 사회도 분명 책임이 있다.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체질을 바꾸려는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참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최근 쟁점이 되었던 안산 선수 숏컷 페미 논란이 떠올랐다. 짧은 헤어스타일을 했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라며 어린 선수에게 남혐 프레임을 씌우고 무차별적인 비난을 퍼붓는 일부 네티즌들의 행태가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 논란을 주도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주요 사용자층이 이삼십대 남성들이라는 점이 
알려지며 인터넷상의 주목을 받았다.

최근 이삼십대 남성들의 극단적 보수화 경향에 특정 지역 비하, 페미니즘 운동 폄하, 약자 혐오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큰 사회적 우려를 낳고 있다. 이들의 비뚤어진 분노의 표출을 단순히 개인 혹은 특정 세대의 일탈이나 비행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느끼는 박탈감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할 문제이다. 일본 아키하바라에서 벌어졌던 참극이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전에 불안감이나 상실감이 보수화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삼십대 남성들의 보수화 경향은 이전 세대가 누렸던 혜택을 자신들은 누릴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분노, 기득권을 쥐고 
놓지 않는 세대에 대한 반감과 불만의 표출로 볼 수 있다.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분노를 표현하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게 분풀이하듯 혐오와 멸시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방식으로는 더 나은 세상,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상실감과 패배감에 빠진 젊은이들이 자신의
분노와 의견을 올바른 방향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사회가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글에 유독 공감하는 이유를 <생존 경쟁에
내몰린 젊은이들에게>에서 이렇게 분석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디아스포라’라고 할 순 없으나 내 작품의 디아스포라 적인 감각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사회에서 자신이 주변화되고 무력해지고 고립됐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항상 머조리티의 두꺼운 벽에 부딪혀
그 무지와 무관심에 조바심 내며 절망해 온 것처럼 그들은 이 사회의 주류인 어른들과 기득권층에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이런 이유로 유독 이 책이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각종 고시에 
합격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는 사회에서 낙오자 편에 있는 나는 늘 은은한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적당한 시기에 좋은 직업을 갖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우리 사회에는 마치 인생의 일정한 시기에 
달성해야 하는 ‘과업’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이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면 인생의 패배자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사실상 이 사회에서 ‘승자’ 편에 속하는 사람은 
소수임에도 ‘패자’에 속하는 다수의 사람은 자신이 비주류가 된 심정을 느낀다. 소수가 행복하고 다수가 불행한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까?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건 물론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런 세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약자와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사회, 최대한 많은
사람이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아이 혐오, 노인 혐오, 여성 혐오, 성 소수자 혐오……. 온갖 혐오가 난무하는 ‘혐오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마치 누구나 성인 보호자의 배려와 도움이 필요한 어린 시절을 거쳐왔고, 나이가 들면 노인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다. 지금 혐오를 멈추지 않는다면, 타인에게 겨눴던 혐오의 칼날은 언젠가 나를 향하게 될 것이다. 약자를 혐오하고,
소수자를 배척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디아스포라’로 칭할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디아스포라’의 입장에
서게 된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늘 타인과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류 문명과 역사는 늘 자유와 평화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승자와 패자,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어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함께 연대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