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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글나라 편지쓰기대회 일반부 최우수상
제 96호 소식지
비 내리던 토요일 오전, 남편이 주문한 말린 문어발 택배가 도착했어요.
건어물을 좋아하는 남편은 시간 내어 인터넷 쇼핑으로 괜찮다는 후기의 문어발을 주문 했더라구요.
시원한 맥주 한 잔에 도착한 문어발을 개봉해 앞뒤로 구워 씹어보니 달큰한게 자꾸 손이 갔어요.

“우리 엄마가 문어발 엄청 좋아했었어. 서산 시장에 갈 때면 문어발 여러 개 사서 심심하면 구워서 드셨지.
그땐 딱딱해서 무슨 맛으로 먹나 했는데, 오늘 온 것은 그때 먹던 맛이랑 똑같은 것 같아. 
먹을수록 달큰한게 맛있네.”

먹다 보니 한두 마리는 뚝딱, 잘 먹지 않던 맥주도 한 캔을 순식간에 비워버렸지요.

“자기 요즘 장모님 이야기 자주 하네. 꼬막이나 바나나 먹을 때도 그렇고.”

남편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엄마를 이렇게 가끔 내 이야기속에서 만나고는해요.
전 엄마 없이 살아온 시간이 엄마와 함께 한 시간보다 더 길어요. 이미 삼십여 년 전 엄마를 떠나보냈으니까요. 
서른아홉이라는 나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떠난 엄마보다 전 지금 더 긴 세월을 살아 내고 있어요. 
엄마에게 마흔이란 나이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엄마! 전 엄마가 떠나면 우리 집 형편이 조금은 필 줄 알았어요. 
너무 많은 병원비에 집도 살림도 엉망이고, 차라리 빨리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해봤었어요. 
병간호에 뱃일에 우리 챙기느라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른 아빠를 보면서도, 
반면에 살려는 의지가 별로없이 입퇴원을 반복하면서도 술을 끊어내지 못하는 엄마가 
더 원망스럽고 싫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경화. 
동네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이런 엄마를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손가락질했었지요. 
그땐 엄마가 전부 틀렸고 아빠가 옳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인지 엄마가 돌아가시고도 빈자리를 쉽게 느끼지 못했어요. 
항상 엄마는 우리 곁에 없었고, 엄마로서 엄마 자리에 있었던 기억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누가 엄마 이야기를 물어오면 항상 얼버무렸지요. 대충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그렇게 엄마를 포장하기에 급급했던 전 제 마음속에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어요. 
엄마 때문에 언니와 내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고, 
꿈조차 펼치지 못했다고 늘 원망했고 그런 엄마랑 살아야 했던 아빠가 그저 안쓰럽고 불쌍했었거든요.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 먹어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길러 보니 
엄마가 이러한 소소한 행복을 등지면서까지 술에 의존해야만 했던 
그 어떤 이유들에 대해 알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문득 찾아오더라구요. 
물론 그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애써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외면해 두었던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제는 꺼내어 볼 용기가 조금씩 났어요.

이모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엄마가 처음 술을 먹게 된 게 저 때문이라고. 
언니가 딸이라 모두 둘째는 아들을 바랐는데 제가 태어나니 시집살이도 심해졌고, 
당시 아빠도 술을 많이 먹을 때라 엄마 혼자 많이 힘들었다고 들었어요. 
거기에 모유까지 나오지 않아 고생하는데 
누군가가 막걸리를 먹으면 모유가 잘 나온다는 말에 한 잔 두 잔 먹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처구니없고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이런 이야기들을 
정말 엄마가 믿었다는게 상상이 가지 않았어요. 
설마 어리석게도 속는 셈 치고 당시 어려운 살림에 해 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건가요?

그리고 가끔 엄마는 자신이 창피하냐고도 물어보곤 했었지요? 
자신의 왼쪽 손가락들 때문에요. 
남들과는 다른 엄마의 왼손. 엄지 빼고는 손톱 없이 살들로 동그랗게 뭉쳐진 손가락들. 
외할머니 뱃속에서 왼쪽 손가락들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고, 
병원에서 치료나 수술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 외가댁 형편으로는 생각도 못 할 일이었겠죠.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지만 저는 진심으로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부터 보아온 엄마의 모습이었기에 이상하지도 낯설지도 않았거든요. 
하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엄마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던 오래전의 모습들이 떠오를 때면 
마음이 불편하고 속이 상해와요.

이모들은 “우리 복실이 언니는 얼굴도 뽀얗고 예뻐서 좋다고 따라다니던 사람도 많았는데 
그 손 때문에 결국 너희 아빠 같은 사람 만났지.”라며 말끝은 꼭 아빠를 탓했어요. 
세상 좋은 우리 아빠를 흉보는듯한 이모들의 말은 참 듣기 싫었어요.

당시 전 엄마가 아빠에게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매일같이 반복되던 다툼은 늘 엄마가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아서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던 아빠의 오래된 외도와 폭력은 
엄마에게도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온전히 살아가기 어려웠다는 것을 아주 늦게야 알아버렸어요.

엄마, 저도 결혼해서 살아보니 남편이 남의 편 같을 때가 정말 많았어요. 
수도 없이 다투고 헤어질까도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차마 그러지 못했고 또 그런 시간들을 지나오다 보니 
어느새 남편을 이해하게 되고 보듬어 주는 날도 오더라구요. 
어르신들이 자식 때문에 참고 산다고 했던 말은 참 바보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되어 보니 부모 문제 때문에 아이들이 눈물 흘리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정말 보지 못하겠더라구요.  
엄마도 그랬을거잖아요. 
언니와 저 생각해서라도 술 끊고 어떻게든 살아볼 생각은 정말 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어요.

삼십 년 전, 엄마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저나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기대고 속상함을 털어놓았다면 
지금 우린 서로 그리워하지 않고 얼굴 맞대고 살 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때의 내가 엄마의 그 모든 아픈 현실을 알았다면 힘이 되어 줄 수 있었을지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 잠자리에 누워 오만가지 생각에 뒤척일 때가 있어요.

엄마가 살았던 삼십 년 전과는 세상이 상상도 못할 만큼 편리하고 좋아졌어요. 
동네로 찾아오던 부식차 대신 집 앞 24시간 편의점에서부터 마트가 즐비해 있고, 
서산 시장까지 한 시간씩 버스 타지 않아도 왠만한것은 택배로 집 앞까지 배달도 해주는 세상이에요. 
봄이면 좋아하는 꽃구경, 여름이면 휴가도 가고, 
가을이면 단풍 구경, 겨울이면 따뜻한 나라로 여행도 갈 수 있는데, 
이 모든 행복한 순간들에 어김없이 엄마의 자리는 비어있네요

시간을 거슬러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당시의 엄마 선택이 최선이었다, 모두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다시 만날 먼 훗날의 그때까지도 저는 여전히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너무 보고 싶어지는 날에는 지금처럼 남들 몰래 눈물짓겠죠.

우리 서로 얼굴 마주하는 그 날, 엄마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우리 작은 딸 은희야, 엄마 없이도 힘든 세상 잘 살아주었구나.”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엄마 품에 안겨 한바탕 소리 내어 울어버리고 싶어요.
그렇게 떠난 엄마가 미웠다고, 그리고 정말 보고 싶었다고.

                                                                                   2021년 4월 어느 날
                                                                                   - 작은 딸 은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