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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글나라독서감상문대회 일반부 최우수상
제 76호 소식지

늙음이 그림자의 삶이 아님을 《두 늙은 여자》를 읽고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엄마 생각이 났다. 물리적인 늙음과 나이 듦을 거부할 수 없기에 진행되는, 노화를 겁내는 요즘의 엄마 표정을 떠올랐다. 몸이 점점 말을 듣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할 기회가 적어지고, 깜빡하면서 잊는 게 많아지고. 그럴 때마다 자식과 주변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들이 늘어난다고 우울해한다. 이런 삶이 무섭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만드는 두려움이 어찌 엄마에게만 다가오는 일이던가. 엄마와 서른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나도 마찬가지고, 주변의 많은 사람도 비슷하다. 엄마의 두려움이 전해질 때마다 나는 괜찮다고, 늙어가는 게 그런 걸 어쩌겠냐고 말하며 위로하지만, 나 역시 두렵다. 사랑하는 엄마의 늙음이 더해질 때마다, 그런 변화로 엄마가 우울해할 때마다, 엄마로 인해 나의 부담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어떻게 해야 좋은 건지 몰라서 말이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도 잘 늙어가고 싶다는 거다. 누구에게 짐이 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하지 못해서 끝내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면 나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바람으로만 멈추기도 하고, 내 의지와는 다르게 다른 이의 짐이 되기도 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게 정말 그런 것뿐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년의 인생이란 다른 이에게 의지하는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무섭다. 두 늙은 여인 ‘칙디야크’와 ‘사’가 부족의 무리에서 처음 가졌던 태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늙었으니까, 그들의 몸이 젊은 사람들과 다르니까, 그들이 젊을 때 일했던 것처럼 지금 젊은이들이 일하는 게 당연하고, 나이 든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일. 나이든 사람의 특권이라고 여기며 살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그들이 속한 알래스카 유목민의 삶이 다 그러하다고 생각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추위를 피해 유랑하는 삶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먹을 것이 많은 곳으로, 여기보다 덜 추운 곳으로 그들의 몸을 뉠 곳을 찾아다닌다. 혹독한 추위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게 하고, 집단 유랑을 더 힘들게 했다. 그들의 선택은 한가지뿐이었다. 이동에 부담을 주는 존재를 두고 가는 것. 나이 들고, 잘 움직이지 못하고, 그들의 먹이 사냥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두 여인을 두고 가기로 한다. 부족 다수의 의견에 다른 의견을 말할 수는 없다. 모두의 목숨이 위태로운 추위를 이기면서 이동해야 하는 일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두 여인까지 함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칙디야크의 딸마저 입을 다물었다.

 
남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어머니까지 외면해야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게 제일 나은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두 여인이 무리에서 외면당하고 그 자리에 남겨진 순간, 암울했다. 남겨진 두 여인이 살아갈 수 있을지, 독자가 확인하게 되는 건 곧 이어질 두 여인의 죽음이 아닐지, 부족민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결론으로 끝나고야 마는 것인지.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 조용하고 추운 땅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이윽고, 결심에서라기보다는 필사적인 감정으로 그녀는 친구의 말을 따라했다. “뭔가 해보고 죽자고.” (33페이지)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어떤 간절함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소설 속 부족들의 사고도, 남겨진 두 여인의 삶의 자세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의 마음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에 멈춰져 있었다면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고, 늙음의 괴로운 순간만 각인할 것이고, 나이 듦을 죽음으로 연결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테니. 어차피 한 번 죽을 인생인데, 뭐라도 해보고 죽자는 두 여인의 다짐 앞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자세를 불어넣는다. 아무것도 안 하고 부족의 젊은이들에게 목숨을 의탁했던 두 여인은 스스로 뭔가를 하지 않으면 바로 죽음으로 향한다는 것을 느끼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추위를 피할 집을 만들고 불을 피운다. 멀리까지 나가 고기를 잡아 저장한다.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의 삶도 준비한다. 이대로 멈춰있다면 내일 맞이하는 건 죽음뿐일 테니, 오늘 움직일 수 있을 때 조금 더 노력해서 내일을 준비할 자세를 취한다. 가능했다. 그들이 마음먹은 일이 조금 더딜 뿐 모든 게 가능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식량 사냥에 불가능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거다. 두 여인을 버린 부족이 굶주림에 허덕일 동안, 두 여인은 살아남았고 식량까지 비축할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우리가 가려는 곳에 가까워지는 거야. 오늘 나는 몸이 좋지 않지만, 내 마음은 몸을 이길 힘을 갖고 있어. 내 마음은 우리가 여기서 쉬는 대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해. 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야.” (69페이지)

 
두 늙은 여인의 삶이 변했다. 처음에 남겨진 두 여인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건,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대접받기만 했던 두 여인의 죽음이었다. 젊은 사람도 버티기 힘들어 두 여인을 두고 떠나간 자리에서 곧 마주할 죽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도 할 수 없던 일을 두 여인이 해내고 있었으니, 잊고 있던 삶의 자세가 하나둘씩 두 여인에게 각인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들이 젊은 시절을 보내는 동안 해왔던 일. 사냥하고 집을 짓고, 지난날 열심히 살아왔던 흔적들을 꺼내면서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들이 생의 열렬한 시간을 보냈던 순간들이 다시 찾아왔다. 우리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직 너무 많이 남아있다고, 더는 버림받는 게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끌어가야 한다고. 두 여인이 이뤄낸 것들이 늙음과 죽음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지혜, 현명함, 경험, 연륜... 나이라는 숫자가 보여주는 것은 많겠지만, 이 여인들에게서처럼 ‘늙음’이 가장 먼저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그 늙음 뒤에 켜켜이 쌓인 것들을 못 보고 지나칠 때가 많다. 오랜 시간 경험으로 몸이 기억하는 삶의 태도를 다시 끄집어내면서, 퇴화하지 않은 몸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두 여인이 보여줬다. 다시 돌아온 부족의 손은 배고픔과 추위에 텅 비어 있었다. 외로움까지 떨치지는 못했지만, 부족민들이 물리적인 늙음을 기준으로 두 여인을 버렸던 것을 보면 두 여인의 삶은 풍요로웠다. 부족민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인간이 나이라는 숫자로 버리고 버려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늙음을 좀 더 현명하고 조화롭게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 동시에 나이 든 사람에게도 삶의 긴장감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를 한다. 늙음이라는 건 이제는 움직임을 멈춰도 되는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정말 내 몸이 더는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몸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이다.

 
“저들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걸 몰라. 하지만 내일 날이 밝으며 알게 되겠지. 그러면 우리는 저들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잊지 마, 친구. 저들이 우리에게 같은 짓을 저지른다 해도 우리는 다시 살아남을 거야. 그리고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더 어려운 시기가 닥칠 때 바로 우리가 저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게 될 거야.” (142~143페이지)

 
이 소설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젊음과 늙음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서로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젊음과 늙음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이 공간의 숙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서로를 외면하면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생존이라는 치열할 싸움을 하면서 사는 건 누구나 똑같다. 이럴 때일수록 ‘공존’의 의미가 더 깊게 새겨져야 한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여든과 서른이 보낸 계절의 경험이 다른 것처럼, 일흔다섯과 마흔이 보낸 세상의 흐름이 다른 것처럼, 어우러짐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같이 사는 방법 같다. 늙음이 살아온 시간을 존중하며, 젊음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잘 어우러지길, 맞서는 게 아니라 섞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더는 나이 듦이 죽음과 동의어가 되지 않기를, 시간을 켜켜이 쌓아 지켜온 경험들을 존경하기를. 젊음의 태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를, 자기보다 덜 살아온 이들에게도 배울 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얼마 전, 아버지의 첫 기일을 준비하면서 엄마와 의견 차이로 자주 다퉜다. 집에서 처음 있는 일에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준비해야 했다. 준비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엄마와 나의 다른 생각이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게 했다. 엄마는 옛날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모든 것을 옛날식으로 얘기했고, 나는 요즘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며 복잡하다고 반대했다. 도대체 어른들의 입맛은 어떻게 맘에 들게 해야 하나? 가격 대비 효과적인 답례품은 뭐가 좋을까? 무언가를 정해야 미리 준비할 수 있는데, 결정된 게 하나도 없어서 우리의 언쟁은 늘어갔고 일은 계속 미뤄졌다. 더는 미룰 수 없기에, 나는 어느 정도 엄마의 의견을 들으면서 내 생각을 차근차근 다시 이야기했다. 인원을 생각해서 식사는 어디서 어떻게 해야 괜찮은지, 얼마의 비용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효과적인지,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을 전해야 하는지... 나의 설명에 엄마는 이해하는 듯했고, 결국 모든 결정은 내가 하게 됐다. 엄마가 내 얘기를 듣고, 더욱 나은 방법이란 것에 동의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일이 다 끝나고 우리는 웃으면서 잘 마무리했다는 생각을 했고, 우리를 찾아와주었던 사람들에게도 좋은 후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흔 몇 해를 살아온 엄마의 방식이 틀린 건 아니다. 마흔 몇 해를 살아온 내 방식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그냥,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가 경험한 게 달랐을 뿐이다. 서로가 꺼내놓은 얘기가 일방적이 아니라 오고 가며 결과를 만들어낼 때, 서로가 살아온 다른 시간 사이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조금 알았다. 이제 나는 엄마에게 크게 바라는 것 없이 말한다. 똑같은 일을 또 해야 한다면 조금 빨리 결정을 해주는 게 좋겠다고, 너무 늦으니까 좀 더 확인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이다. 엄마가 이번 일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애쓰는 게 보인다. 옛 시간을 살아온 당신의 방식과 요즘을 살면서 익숙한 우리 방식의 다른 점을 느끼면서, 변해가는 세상에서 어느 정도는 사람도 같이 변해가는 게 삶의 자세라는 것을 알겠다는 듯이. 이번 일로 엄마가 가진 경험과 연륜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도 엄마의 지혜와 현명함을 배우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