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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글나라백일장대회 중등부 최우수상_김재원 [붕대가 다시 감아지더라도]
제 75호 소식지

붕대가 다시 감아지더라도

대방중학교 3학년 2반 김재원

 

 

  놀랍도록 대단한 일이거나 유독 슬픈 일이면 ‘OO주년등으로 지난 일을 되새기고 기념한다. 내게도 기념일이란 게 있는데 안타깝게도 내 경우는 후자의 경우다. 내가 두 개의 엄지발가락을 수술한 지 1주년이 되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병원에서의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15년 삶에서 병원생활은 짧았지만 그만큼 강렬했다. 게다가 아직도 발가락이 완치되지 않아 지금까지도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악운이라고만 부르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 이 글을 통해, 1년 전의 기억을 되새기고 그것이 내게 어떤 교훈과 선물을 주었는지 말하고 싶다.

 

일 년 전, 초여름 날의 새벽이었다. 나는 발치에 있는 베게에 붕대가 감긴 두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새어나온 피 때문에 붕대 전체가 핏빛을 띄었고, 발가락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발가락이 지끈지끈 쑤셔왔다. 통증은 불과 몇 분 전에 있었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그날은 엄지발가락 두 개를 수술한 다음날이었다. 발가락이 이 모양이 된 이유는 내 키를 좀 더 키워보겠다며 딱딱한 농구화를 신고 매일 줄넘기를 2000개씩 해댄 탓이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서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농구화의 강한 압력에 엄지발톱 두 개가 사이좋게 덜렁덜렁 거리고 발가락에 고름이 차 통증이 심해지자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서 이 일로 난생처음 입원을 하게 되었다.

 

 바로 그 발톱들을 뽑아낸 다음날의 밤이었다. 마취가 살짝 풀려 아파오기 시작하는 붕대 속의 발가락들을 뒤로하고 잠이 들었다. 간밤에 누군가 나를 깨웠다. 어제 수술을 보조했던 의사였다. 창고실로 오란다. ‘드레싱이라고 불리는 수술 부위 소독 때문이었다. 드레싱이라고 하면 샐러드에 뿌리는 과일향의 상큼한 액체를 상상하기 쉽지만, 병원에서의 드레싱은 그 반대로 끔찍했다. 추운 창고실 안에서 나는 오들오들 떨며 의사가 붕대를 푸는 것을 지켜보았다. 붕대가 점점 풀릴수록 발가락의 통증이 심해졌고, 발톱 없는 발가락 바로 위에 붙은 밴드를 떼어내자 오금이 저리도록 아팠다. 발가락을 알코올로 소독하는 건 더 최악이었다. 무방비 상태인 맨 살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드레싱이 다 끝나자 의사는 내 발에 다시 조심스레 붕대를 감아주었다.

 

인생 최대의 고난을 겪고 나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발가락의 아픔 때문에 현실에 좌절하는 것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퇴원하여 일상적인 생활을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상적인 생활. 나는 입원하기 전까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몰랐다. 이제 붕대를 풀고 나서 매일의 생활을 더욱 행복하게 살아낼 자신이 생겼다. 따뜻한 물로 씻고 편안한 내 침대에서 누워 자기, 엄마가 해주는 아침밥 먹기, 학교생활 하기 등 너무나 일상적으로 여겨졌던 일들을 할 행복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현실의 고통을 견뎌냈다.

 

 하지만 퇴원하고 나서도 내 수난은 계속되었다. 일상의 선물에 감사하자며 다짐했던 것은 모두 잊고 발가락 때문에 운동을 못하게 된 것에 좌절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발가락을 다치게 만든 과거를 후회했는데, 그것이 현실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데는 어려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이거 하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과유불급. 지나친 것이 미치지 못한 것보다 못하다. 나는 키가 크고 싶어서 매일 줄넘기를 했고, 그 결과 발가락을 망쳤다. 키가 크고 싶다는 건 꿈이자 소망이었지만 줄넘기를 계속 하면서 그건 욕심으로 바뀌었다. 다리가 아프고, 피곤한데도 줄넘기를 계속하자 몸에 무리가 왔다. 꿈은 언제나 내게 소중하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고 더 나은 나를 위해 노력하게 한다. 하지만 꿈이 너무 지나쳐 욕심이 되는 순간,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는 것이 되어버린다.


 또, 지금까지도 완치되지 않은 발가락과 지난 1년간 친구 아닌 친구를 하면서 내 아픔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비하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충만한 사랑으로 성장하기도 하지만 결핍과 수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베토벤은 말년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고, 호주의 선교사 닉 부이치치는 태어날 때부터 사지가 결핍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수난에 굴복하지 않고 삶을 당당하게 살아냈다. 내 수난은 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수난보다 훨씬 작고 보잘 것 없다. 따라서 나는 이 결핍에 좌절하지 말고, 결핍을 극복한 이들처럼 당당하게 현실을 살아내면 된다. 그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성장하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있다. 청춘은 젊기에 여러 가지 아픔을 겪을 일이 많고, 젊기에 그것을 극복해 낼 수 있다. 앞으로 수 년 동안 지속될 청춘 속에서 나는 많은 아픔을 겪을 것이고, 1년 전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아픈 수난이 나를 덮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것들을 모두 극복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현실을 열심히 살아갈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욕심을 부리지 않되 계속하여 도전하고, 실수로부터 오는 상처가 나를 좌절시키더라도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다면, 내 청춘은 더할 나위 없이 환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