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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글나라편지쓰기대회 최우수상 - 고등부 서태란
제 49호 소식지

12월 어느 늦은 밤,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었던 눈송이 같은 연희에게.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 눈앞에 빛나는 태양, 옆에서 함께 가는 친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리."

 

에런 더글러스 트림블이라는 배우가 남긴 명언이야.

윤리 시간에 들었던 문장인데 가슴에 와 닿아 기억해두고 있었어.

참 좋은 말이야, 그렇지?

너도 이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너의 옆엔 늘 내가 함께 걷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우리가 공부, 가족, 꿈 등의 많은 관계들 속에 얽혀 사는 만큼 앞으로 상처 받을 일도, 아픈 일도 정말 많을 거야.

하지만 이거 하나만 기억해.

너의 옆에는 내가 있다는 거.
우리에겐 울고 싶을 땐 단비를 내려주고 즐거울 땐 산들바람이 되어주는 서로가 있잖아.

길이 안보일 땐 서로를 믿으며 길을 만들어내면 되는 거고, 너무 지칠 때는 서로 기대어 그늘에 앉아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돼.

서로가 있다면 그 어떤 길도 두렵지 않으니까.
남은 길도 항상 같이 걷자, 친구야.

 

안녕, 연희야.

이렇게 편지로 내 소식을 전하는 것도, 네 안부를 묻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아.

항상 핸드폰으로 대화하다보니까 등 돌리면 다 잊어버리곤 했었는데 이렇게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쓰다 보니 뭔가 마음이 둥실거리는 구름으로 가득 찬 느낌이야.

설레기도 하고 이 편지를 받은 네가 어떤 생각을 할 지 궁금하기도 하네.

사실 학교 가는 길, 문득 느껴지는 여름 냄새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됐어.

녹음 짙푸른 여름 냄새, 너도 느껴지니?

매미 울음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 하고 안개꽃, 맨드라미, 찔레꽃은 벌써부터 눈앞에 아른거려.

아직은 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이젠 저 먼 곳부터 푸른 솔향기가 나.

여름이 오고 있다는 뜻이야.

그러고 보니 이번에 올 여름은 너와 내가 맞는 다섯 번째 여름이겠구나.

너와 내가 벗이라는 소중한 연을 맺은 지 벌써 5년째라는 거네.

사실 잘 실감이 나지 않아.

너와 내가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한 것도, 그 사이 우리가 엄청 많이 커버렸다는 것도.

 

봄, 노랗고 향기로운 숨을 가득 머금은 연희야,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거야.

우리는 처음 입어본 교복이 정말 어색했어.

소매도 길고 치마도 무릎까지 내려와 누가 봐도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처럼 보였을 거야.

하지만 그만큼 풋풋했던 시간이 또 어디 있을까.

또 그만큼 사랑스러운 계절이 또 어디 있을까.

그 때 우리는 유행 따라 다 같이 앞머리를 내리기도 했어.

얼마나 우스웠었는지.

서로 얼굴을 보며 숨넘어갈 듯 웃었던 거 기억나니?

우리는 아침마다 지각할까봐 달리기도 참 많이 달렸어.

어쩔 수 없이 지각을 하게 되면 생활지도부 선생님께 정말 많이 혼났지.

하지만 혼나면서도 항상 즐거웠어.

아마 너와 함께였기에 그럴 수 있었겠지.
우리는 참 많은 걸 함께했어.

연분홍빛을 담은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함께 걷기도 했고, 시험이 끝난 뒤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러가기도 했지.

수련회에 가서 노을빛으로 물든 바다를 함께 보기도 했고, 같이 누워 잠을 청한 적도 있어.

2년 전 갑자기 네가 안양으로 이 동네를 훌쩍 떠나버린 바람에 전만큼 너와 이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진 못하고 있지만 난 괜찮아.

네가 가까이 없는 순간에 한 번 더 네 빈자리를 생각하게 되고 너를 떠올리며 편지를 쓸 수 있으니까.

너의 갑작스런 이사가 오히려 우리를 더 돈독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없는 동안 이 동네, 그리고 나, 너는 참 많이 바뀌었어.

이사를 간 뒤 한 번도 이곳에 오지 못했으니 너도 이곳이 참 궁금할 거야.

여긴 매년 너와 함께 맞았던 벚꽃들이 져버렸어.
벚꽃은 참 예쁜데 너무 빨리 져버리더라.

꼭 우리의 중학교 시절이 떠올라.

가장 풋풋하고 아름다운 시기이지만 너무 빠르게 지나버리는 게 벚꽃과 많이 닮은 것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내년에는 이 벚꽃, 너와 같이 예전처럼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너랑 하교할 때면 꼭 하나씩 물고 다녔던 아이스크림, 그걸 팔았던 동네 마트는 이제 편의점으로 바뀌었어.

주인아주머니도 정말 친절했는데, 많이 아쉽더라.

나랑 너도 참 많이 컸지.

내 키는 이제 엄마보다 커.

이젠 제법 꾸밀 줄도 알게 됐고 교복 입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되어버렸어.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꿈이 조금씩 두렷해져가는 게 느껴져.

그리고 이젠 예전처럼 달리지 않아.

지각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서곤 해.

물론 아직도 아슬아슬할 때가 많지만.

이렇게 나는 많이 변했어.

너도 많이 변했겠지?

변했다는 건 나쁜 게 아니야.

그만큼 많이 자랐다는 거고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거니까.
그 봄, 우린 참 싱그러웠던 것 같아.

 

여름, 따사로운 햇빛에 지친 땅 위로 쏟아지는 긴 장마 같은 연희야.
어른이 되어간다는 게 참, 설레기도한데 두렵기도 해.

네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털어놓을 때면 마음이 좋지가 않아.

우리 또래 아이들이 다 같은 마음일거야.

나 역시도 그래.

나는 아직 내 날개가 다 완성되지 않은 것만 같은데, 사람들은 자꾸 나에게 날아보라고 하지.

넌 저 눈부신 하늘을 찬란히 가로지를 수 있노라고, 더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노라고.

그렇게들 얘기하지만 자꾸 주춤거리고 망설이게 돼.

우린 어느새 십대의 끝자락에 서 있고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면 더 넓은 세상으로 가게 될 거야.

작은 사회,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을 토대로 더 큰 사회에서 엄마, 아빠 같은 멋진 일들을 하게 되겠지.

있잖아, 연희야.

너만 막막하고 두려운 게 아니란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첫 비행을 두려워하고 도피하려 해.

나의 보잘 것 없는 날개 때문에 추락하진 않을까 걱정이 잔뜩이겠지.

사실 나도 많이 두려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는 것만 같고, 버튼이 없는 엘리베이터를 탄 것처럼 언제 내려야할 지 모르는 부담감을 항상 안고 있어.

좀 더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겨있고 싶고 친구들과 시끌벅적한 교실에 남고 싶어.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아름다운 봄과 여름에 멈춰있을 수는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우리가 받고, 우리가 겪었던 모든 것들을 다른 새싹들에게도 베풀 때가 온 거야.

우리가 받았던 만큼 그 새싹들을 사랑해주고, 거름을 주고, 비를 내려주는 것. 그게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준 사랑으로 무럭무럭 자란 새싹들은 또 다른 새싹들에게 여태 받아 온 사랑을 돌려주겠지.

그렇게 돌고 도는 게 가장 아름다운 과정 아니까 싶어.

아마도 우리는 눈부셨던 봄과 여름을 다시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감정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기에 더 빛나는 거 아닐까?

추억은 가슴 한 켠에 새겨둘수록 더 빛나는 법이잖아.

연희야.

가장 떨리고 막막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거 잘 알아.

하지만 견뎌 내보자.

우린 잘해 낼 수 있을 거야.

설령 넘어지면 어때.

비온 뒤 땅이 더 굳어지듯 천천히, 하나씩 배우고 익혀 가면 돼.

그 여름, 우리는 같이 걷고 있는 중이야.

 

가을, 알록달록한 색깔을 품고 만개하는 공작초 같은 연희야.
공작초는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대.

봄, 여름을 지나온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가을에 서있을까?

넌 간호사가 되고 싶다 했었지.

아마도 넌 어엿한 간호사의 모습으로 가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참 너에게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생각해.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진심 어린 손길로 치유할 수 있는 것. 배려심 많고 속 깊은 너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직업인 것 같아.

넌 외적인 상처말고 내적인 상처도 어루어 만져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사람이거든.
예를 들어줄게.

내가 너에게 내 어깨가 너무 넓은 것 같다며 투정부리듯 말했던 날 기억하니?

한창 외모에 신경 쓸 때라 그런지 정말 스트레스를 받았었어.

속상하기도 했고.

근데 그 때 네가 내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고나서 내게 했던 말 난 아직도 있지 못해.

" 어깨가 넓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기댈 수 있다는 거잖아. 난 너의 어깨가 가장 아름답다고 믿어. " 라며 너는 웃는 얼굴로 말해주었지.

머리를 맞은 느낌이랄까.

생각지도 못했던 네 그 예쁜 말에 정말 감동 받았었어.

네 말대로 내 어깨가 힘든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멋진 일이니.

그 뒤로 나는 내 어깨를 좀 다르게 보았던 것 같아.

불평 하지도 않고, 짜증을 내지도 않았어.

오히려 내 어깨가 정말 아름다워 보이는 거 있지.

너는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다독여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또 중학교 마지막 수련회에서 난 너에게 한 번 더 감동 받았었단다.

칠칠맞은 내가 바다에 넘어져서 손을 다쳤던 둘째 날, 불편한 게 정말 한 두 가지가 아니었어.

갑자기 하게 된 깁스 때문에 옷을 입는 건 물론 씻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지.

근데 넌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것들을 정말 잘 알고 해주더라.

숙소에 도착하면 늘 내 이부자리는 네가 만들어줬었고 물을 떠와 세수도 시켜줬었지.

피부가 중요하다며 로션도 발라주고, 바지 단추를 잠가주기도 했어.

너에겐 참 별거 아니었을 텐데 난 그게 너무 고마웠던 것 같아.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척척해주는 모습을 보고, 이래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중요하다는 거구나 생각했던 것 같아.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날 챙겨줬던 너를 향한 나의 감사가 이 편지에 잘 담겨 전해졌으면 좋겠다.
이런 이유들로 난 네가 간호사가 되어서도 정말 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간호사라는 직업이 치료만 할 줄 알아서는 안 되거든.

따뜻한 말, 따스한 손길. 그런 것들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병든 사람들에겐 정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

나도 너의 그런 점을 닮아가기 위해 계속 노력할게.

그 가을도 나와 함께 걷자, 연희야.

 

겨울, 이 세상을 찾아와준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연희야.
너와 난 참 다른 사람이야.

태어난 것조차 극과 극이지.

나는 봄에 태어났고 너는 겨울에 태어났고.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고 너는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밝은 아이지.

나는 치킨 날개를 좋아하고 넌 다리를 좋아했지.

난 달리기를 못하지만 넌 계주까지 했었고.

이런 소소한 것들부터 다른 우리는 다르기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아.

퍼즐에 어느 한 부분이 들어가 있는 아이는 그 한 부분이 튀어나온 아이와 맞물리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게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너와는 다툰 적이 없어.

물론 서먹서먹한 적은 있었지만 배고프다는 한 문장에 언제 서먹했었냐는 듯 훌훌 털어버리는 우리였잖아.

아무 말 없이 서로 다른 일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서로 눈만 마주쳐도 무슨 일이 있는 지 아는.

이런 친구를 만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선뜻 내 친구가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

내가 너에게 의지하는 만큼 너도 나에게 기대도 된다는 거 정말 있지 마.

그럼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계절을 상상해보자.
겨울, 네가 태어난 계절이잖아.

쓸쓸하고 고요하지만 어찌 보면 가장 따뜻한 계절.

세상에 새하얀 눈으로 찾아와 준 너는 겨울과 참 어울려.

앙상해진 나무 위로, 사람들의 지붕 위로, 아이들의 머리 위로 소복이 쌓이는 눈은 깨끗하고 투명한 너의 이미지와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아.

난 우리가 세월이 많이 흘러 늙었을 때도, 이런 순수한 모습 이였으면 좋겠어.

얼굴엔 주름이 졌지만 가슴은 늘 따뜻하고 눈엔 진실이 담긴 그런 사람으로 늙고 싶어.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 아마 너에게도 익히 말해서 알거야.

'혜화동'이라는 노래, 기억하니?

김광석이 부른 노래말야.

이 노래는 담담하게 부르는 가사가 더 마음을 울려.

그 중에서 참 좋았던 노랫말은 이 부분이야.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 지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어릴 적 함께 꿈꾸던 부푼 세상을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글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니?

멀리 떠나가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전철에 몸을 싣고 찾아가는 내 어릴 적 동네.

마치 내가 이 노래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 들어.

유년시절에 함께 뛰놀던 그 골목길에서 만난 내 친구.

마치 이 세상과는 동 떨어진 느낌을 주는 것 같아.

노래에서는 이 친구가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멀리 가는지 가르쳐주지 않아.

하지만 느낌으론 추측할 수 있어.

아마 친구는 다시 만날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향할 것 같아.

그걸 이 노래에선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사는지' 라는 가사로 담담히 표현하고 있어.

정말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 걸까?

혹시나 오랜 벗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벗을 잊어버린 체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이 도입부가 참 가슴을 아프게 해.

벗을 잊고 살만큼 삶이란 것은 정말 고되고 지치는 일이지.

그렇지만 연희야.

사는 게 의미 없어보여도 다 뜻이 있는 걸 거야.

우리는 서로가 있고 또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만큼 우리가 나게 될 그 겨울이 많은 것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어.

너의 그 마지막 겨울도 나와 함께 걸어주겠니?

나의 오랜 벗, 연희야.

 

2017년 5월 9일 화요일
봄을 가슴에 담고, 곧 찾아올 녹음 짙푸른 여름을 기다리는 네 영원한 벗이.
푸른 나무 향기 일렁이는 북한산 아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