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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깎는 여유
제 14호 소식지




김상윤  

고신대학교 부총장  

(사)한국독서문화재단 회장  

 

 한 5년 전인가요. 미국의 저명한 삼담심리학자 한 분이 우리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면서 부드러운 백발이 금발보다 많았던 그분의 인자한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직접 저술하신 책자를 손에 쥐고 계셨는데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그 책갈피 속에 있던 노란 색의 연필 한 자루였습니다. 그 연필은 작은 지우개가 달린 것이었어요. 연필을 깎을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일정을 살아가실 분이신데 어떻게 번거로운 연필을 저 나이까지 사용하고 계실까? 내 마음에 신선한 충격이 와 닿았습니다.

  문득 제가 1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연필을 깎는 것을 배운 것이 생각났습니다. 차츰 혼자서 깎게 되었고 정성을 다하여 나무를 고르게 깎고 연필심을 다듬을 때는 마음속의 먼지들이 가만히 가라앉는 것 같았지요. 몽땅한 연필심이 있는가 하면 가늘고 길쭉한 것도 있어 친구마다 연필 깎는 모습이 조금씩 달랐지요. 처음에는 작은 비행기 모양의 연필 깎는 장난감이 나오더니 손잡이를 돌려 연필을 깎는 기계가 나왔고 이제는 스위치만 누르면 금방 끝나는 전기제품도 나왔지요.

  초등학교에 다니던 석이가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어머니가 옆에서 연필을 깎아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필을 깎는 여유도 없어 보이는 아이들이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의성은 여유로운 마음속에서 자라납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영원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서둘지 않습니다. 연필 하나를 깎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마음일 뿐입니다. 혼자서 연필을 깎고 있는 아이 옆에서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향나무 껍질처럼 우리의 아이답지 못한 조급한 마음도 하나둘 깎여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