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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라독서감상문대회 고등부 최우수상 -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소년은 어른이 될까?
제 56호 소식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소년은 어른이 될까? - 데미안을 읽고 (김나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소년의 모습은 섬뜩하리만치 매력적이다. 환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자신의 분리된 자아와 맞닥뜨린 소년, 싱클레어에게 나는 한순간에 매료되었다. 두 세계의 모순성을 헤아리며 고뇌하는 그의 모습은 눈부셨고, 마침내 그것이 하나이며 그러한 삶을 살고자하였던 그의 열망이, 머릿속에 강렬한 영상으로 박혔다. 어느 때보다 나의 정신은 선명히 깨어있었고, 수많은 추억의 사금파리들이 얽혀 내게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나의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그가 맞닿아 있던 별 세계가 속삭이는, 그러한 이야기를.

 

내가 책을 고르는 데 있어 가장 큰 영향은 언제나 사람들이다. 나는 내가 선망하는 인물이 추천하는 책은 늘 읽는다. 그게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가장 완벽하고 정직한 길이며, 그 책을 읽는 동안에 그 사람의 생각에 어느 때보다 근접한 길이에서 교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문인의 경우라면 그이의 글에 대해 파고드는 참고서 역할도 함께한다. <데미안>도 그런 방식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평소에는 심드렁하다가 누군가 추천하는 순간 번쩍, 하고 읽게 되는, 그렇게 나를 스쳐갈 수많은 책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가끔씩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람을 놀래기도 한다. 처음으로 나는 책을 다 읽자마자 펜을 들었다.

 

<데미안>은 소년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겪는 성장의 이야기다. 데미안은 어른처럼, 그냥 어른이라기보다는 신사처럼 낯설고도 성숙하게 유치한 소년들 사이를 건너는 존재로, 위험에 처한 싱클렝레어를 구해준다. 이후 거듭되는 방황 속에서 마주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속에서도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발견한다. 소설 속에서, 데미안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소설에 보면 어느 날 마주친 이상 속의 여인을 생각하며 싱클레어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인지 불붙어 점멸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싱클레어처럼 무작정 붓을 놀렸을 때 도화지를 가득 메울 인물이 누구일지에 대한 고민과 이미지들이 약물처럼 머릿속으로 번져갔다. 소년 데미안이 품었던 새의 문양, 카인의 표적, 에바 부인의 형상처럼 내 추억 속 막연한 자연물들이 어떠한 형태로 표출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졌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신이 나기도 했다. 그만큼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스스로의 속에서 솟는 것을 위해 발버둥치고 고뇌하고, 방황하며 사랑하는 과정의 이야기란 내게 몹시 인상적이었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써 내리는 문체도 감동적이었다. 작가는 그대로의 그들을 서술하지 않았다. 서술로서 단순히 표현할 수 없는 자아를 감각적으로 3차원의 세계에서 설명했다. 독자들은 그 세계를 지나 멀찍이서 그들의 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짧고 긴 문장들의 어지러운 향연 속에서 주인공들의 발자취를 훑을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내어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헤매어가지도 않도록 여러 방면에서 돕는 작가의 노력이 근사하다고 느껴졌다.

 

책에서는 주인공만큼이나 중요하게 떠오르는 존재가 있다. 압락시스, 태고부터 누구나 지니는 표적을 가진 우리가 정상인으로서 완벽한 삶을 살아갈 때 그의 사상을 담은 새로운 그릇을 찾아 떠나는 신이다. 그는 선(善)의 신임과 동시에 악(惡)의 신으로서 약간 모자란,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갈구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머무른다. 싱클레어가 설명하였던 두 세계를 두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돕는, 또 다른 데미안이다. 그를 숭배하는 종교는 인도자만 있을 뿐, 선도자는 없었다.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도록, 그 길을 충실히 걸어 종국에 알이라는 세계를 깨고 자신에게로 날아올 수 있도록 하는 존재가 바로 압락시스라는 신이다.

 

완벽한 자아란 현실에 고개 숙이고 땅을 걷는 것이 아니라 노란 머리를 하늘 향해 치뻗고 마침내 그 하늘을 향해 뛰어내려 비상하는 것. 알이라는 세계에 갇혀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나를 바라보면서 마침내 나에게 다다르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 압락시스에게 닿는 것. 그 신에 대한 서술을 읽으며 내게 불꽃처럼 튀던 감상이었다. 나는 여태껏 나에게 집중하지 못하였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나는 알에 갇혀 있었다. 수많은 유혹들과 악(惡)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는 나날들에서 나는 도저히 나에게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다. 자아의 성숙에 대해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소설을 대표하는 글귀를 읽을 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의 모든 길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게 하는 글귀였다.

 

[새는 알에서 나와 자기의 길로 날아간다. 알은 세상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상을 깨뜨려야한다.]

 

그리고 이쯤에서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된다. 친구란 나를 비추는 내 안의 자아이다.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그것들은 모두 내 안의 무언가를 상대에게서 보아 그에게 자극받았기에, 나는 너를 통해 나를 본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성장의 증표를 발견한다. 싱클레어의 오랜 벗인 데미안은 길을 이끌어주는 인도자였다. 전쟁의 포탄 속에서 협박당하는 꼬마 싱클레어가 된 그에게 제 어머니가 그에게 해주었듯 나누는 입맞춤은, 영원히 네 안에 남겠노라고 말하며 친구라는 이름으로 분리된 자아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스며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친구의 피가 끊임없이 줄어들지 않고 제 입으로 흐르고 난 뒤, 싱클레어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문 ? 마침내 알을 깨고서 마주한다. 이제는 데미안과 완전히 닮은 얼굴의 자신을.

 

가끔 울컥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코끝이 찡해져서 훌쩍거림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낼 때. 그것이 내 속 깊이 자리한 어린 꼬마를 깨울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소설 <데미안>은 바로 그 순간을 엿보는 듯 했다. 소년들의 우정을 통해서, 어머니와 연인의 혼합된 이미지를 통해서. 단순한 자극으로 남을 것이 아니라 일생을 할퀴어 평생을 간직해야할 자아의 조각들이었다. 모두 알을 깨기 위해서 두드렸던 망치질의 흔적이었다.

 

거대한 파도, 삶의 태풍은 시도 때도 없이 예고도 않고 우리를 덮친다. 그 때마다 우리는 방황하고 고뇌하다 죽음을 간청하게 될 수도 있다. 반드시 오는 그 때는 머릿속이 아찔해져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겠지만,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문장이 생겼다. 모든 만남에서 부딪친 인물들은 결국 모두 나이며, 단순히 스친 인연조차도 모두 나에게 이어지는 통로임을 알려주는 문장. 이 모든 시련들이 알이라는 또다른 세계를 깨기 위해 내가 두드리는 망치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문장.

 

[새는 알에서 나와 자기의 길로 날아간다. 알은 세상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상을 깨뜨려야한다.]